[독자 마당] 75년 전 하나님의 손길
작은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무조건 피난길에 나섰다. 산보라도 가는 줄 알고 좋아하던 동생들도 이제 다 노인이 되었다. 피난길에 찾은 감자밭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아버지도 밭에 들어가 감자 몇 가마니를 사면서 감자밭 주인과 이야기를 하시더니 밭 주인의 문간방을 빌렸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온 식구가 방 한 칸에서 마치 뗏목같이 누워 자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곧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건만 어느새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불이 필요했지만 오빠는 입대했고 동생들은 어리다 보니 내가 집에 이불을 가지러 갈 수 밖에 없었다.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었으니 용산구 서계동에 있던 우리 집에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할 형편이었다. 집에 들려 부랴부랴 이불 보따리를 꾸려 집을 나섰다. 서둘러 한강가에 왔지만 벌써 해가 저물어 내가 타야 할 나룻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언덕 밑에 보이는 배가 마지막 배라고 누군가가 일러 주었다. 죽을 힘을 다해 가까워 보이는 비탈길을 택해 배 가까이에 이르니 사람을 가득 태운 배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배를 못 타면 여기서 죽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은 방망이질을 했다. ‘하나님 저 배를 타게 해 주세요’라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불 보따리를 배에 힘껏 던졌다. 배는 마구 요동쳤다. 그러자 배에 탄 사람들은 내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런데 내 행동을 본 그들이 큰 소리로 웃더니 내 자리를 마련하고는 어서 올라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무서운 광야에서 절박한 순간에 드렸던 나의 짧은 기도를 들어 주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을 90줄에 들어선 지금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감사하곤 한다. 이영순·샌타클라리타독자 마당 하나님 손길 이불 보따리 감자밭 주인 용산구 서계동